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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정말 잘 살았다

배기팬츠를 좋아하는 남자가 현명하게 사는(?) 법

by 이류의하루 2020. 7. 30.

 

두 여자와 사는 한 남자


나는 두 여자와 산다.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우리나라에서 두 여자와 산다면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런데 오해 하지 마시라.  어린 한 여자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재택근무를 하는 딸이며, 또 나이 든 한 여자는 일거리가 많이 줄어 밖으로 나가 일할 기회가 매우 적어진 아내다. 큰 아들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한다. 한 남자는 1년 전에 퇴직한 백수이며, 앞으로도 계속 화려한 백수로 살 요량이다.

이 카테고리는 두 여자와 사는 한 남자인 백수가 두 여자에게 구박을 받고, 핀잔을 들으며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 크다'는 명확하고 근거 있는 원인이 있음을 미리 밝혀두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제1편 / 배기팬츠를 좋아하는 남자

 

< 어린 한 여자가 담은 한 남자 한 여자 >


지방공무원으로 재직한 한 남자의 복장은 늘 어둡고 고전적이었다.

 

상의, 하의는 물론 양말까지도 검정이나 회색톤이 주를 이루었다. 그나마 T셔츠를 고를 때, 입을 때 약간 다른 경로로 이탈은 했지만 출근 때는 어김없이 감성적인 차림새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클래식한 복장이었다. 퇴직 후 버킷리스트 중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30여 년 간 복무해온 공직자의 모습을 말끔히 지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 남자는 꿈에 그리던 정당에 가입했고, 시민단체에서도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남자는 체격이나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다.

 

키는 170CM이지만 하체가 짧은 편이다. 추남은 아니지만 쾌남도 아니다. 주름이 많으며, 특히 얼굴은 크다. 요즘 한 여자와 푹 빠져 시청 중인 '빨간 머리 앤'처럼 외모 컴플레스를 조금은 갖고 있다. 그래도 마음씨 착하면서 강하고, 곧은길만을 고집하는 예쁜 한 여자를 곁에 두운 덕에 살아가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낙천주의자다. 조금이라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한 여자는 가차 없는 비판과 훈계를 한다. 이성적인 말이라 한 여자의 질책은 무조건 감수하면서 또 순응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불행한 적은 없었고, 지금도 두 여자 때문에 즐겁고 행복하다.  

한 남자의 취미는 사진 찍기다.

 

< 한 여자가 휴대폰으로 담은 한 남자 / 세종대왕릉 >

 

지방공무원으로 근무 시 어느 날 홍보팀장으로 보직을 받으면서 사진을 배웠다. 2009년도 7월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했고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이미지가 절대적인 세계였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장비에 쏟아부은 비용은 고급차 한 대 가격을 능가했다.

 

책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많이 읽어서 좋아하는 독자나 독서광이 아니라, 읽기도 하지만 책이 좋아서 구입한다. 디자인이 예쁘거나 예술적인 표지로 출간했다면 내용에 상관없이 구입한다. 그 결과 지난해에도 'yes24'에서 60대 이상 중 0.9%에 해당하는 '플래티넘' 회원으로 선정됐다. 산 책으로 대형 서점을 오픈해도 충분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고수들은 읽으려고 책을 사기도 하지만, 책을 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책을 사기도 한다'라고 했다. 한 남자를 지칭하며 하는 말 같아 큰 위로를 받았다.

 

도자기도 좋아한다.

 

특히 잔을 많이 수집했다. 해외여행 가면 무조건 현지에서 하나씩은 골라 반입한다. 그 많은 잔(컵) 등을 진열할 장식장까지도 구입했다. 보는 즐거움은 매우 크고 환상적이며, 흐릿한 여행 추억을 또렷이 소환해 준다. 

 


서론이 길어졌다. 

 

퇴직 후 잔재한 공직자 상을 지우는 일에는 우선 외모를 바꾸는데에서 출발했다.

 

한 남자는 큰 머리에 맞는 모자를 여러 개 구입했다. 목주름을 가리기 위해 머플러를 찾았다. 겨울이면 건성피부라 비듬이 많아 색깔 있는 양말만을 골랐다. 특히 연두색 양말은 제일 좋아해 보면 사기 때문에 가장 많다. 짧은 다리를 커버해 줄 수 있는 배기팬츠, 개량 한복 팬츠 등을 선호했다. 운동복도 7부 팬츠로 장만했다.

특히 배기팬츠는 편했고, 한 남자의 신체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지난해부터 한창 꽂혀 있다. 인사동에서 구입한 개량한복 같은 느낌의 바지는 여성 잠옷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지만 편해서 좋고, 모임에서도 멋지다면서 단체로 구입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염색하는 분에게 리넨으로 소재로 한 배기팬츠를 맞춰 입었지만 주름이 많아 조금 불만이다. 

며칠 전 여주 이마트 매장에서 베이지 색  리넨 배기팬츠 하나를 구입했다. 

 

원래는 원 프로스 원, 두벌인데 하나는 한 여자 팬츠로 골랐다. 피팅룸에서 입어보니 부드럽고 시원했다. 한 남자 체형에도 알맞고 편했다. 다음 날부터 입고 외출했다. 무엇인가 어색했다. 얇고 가볍다 보니 오히려 못난 오다리 하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했다. 그래도 한 남자는 편해서 입고는 있다.

배기팬츠를 구입하고자 그동안 수 차례 검색했다.

 

검색창이나 페이스북 또는 인스타그램 광고는 온통 배기팬츠 광고였다. 보고 또 봤다. 그 후부터 광고가 자주 올라온다. 그중 한 광고에 그만 필이 또 꽂혔다. 재차 지른다면 분명 한 여자는 가만히 안 있겠다 싶었다. 유혹의 손길은 강했지만 이성의 판단은 허약했다. 한 남자의 감성은 결국 한 여자가 늘 요구하는 이성을 제압하지 못했다. 혼나더라도 가격이 저렴한만큼 길어야 하루 정도 혼나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루만 잔소리 듣지 싶어 끝내 결제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배송물품이 오늘 오후에 경비실에 도착한다고 톡은 왔다.

 

늘 동일한 수법이지만, 혼날 물건을 구입하면 몰래 찾아 며칠 동안 한 남자는 차에 숨기곤 했다. 나중에 반나절 잔소리 들으면 될 듯싶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친절하게도 택배기사님께서 한 여자가 성당을 다녀오는 오전에 때맞춰 출입문 앞에 정확히 배송했다. 한 여자는 재택 하는 한 여자의 택배인 줄 알고 그의 방 앞에 두었다.


어린 한 여자가 택배를 살펴보더니 '아빠 옷이다'며 한 남자에게 다가왔다. 

 

한 남자의 얼굴은 당황했고, 반대편 한 여자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분위기를 파악한 한 여자는 실실 웃으며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 여자의 질책과 훈계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한 여자의 지적에 불쌍한 한 남자는 대응논리를 찾아 응수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듣기 싫은 지적과 가슴을 도려내는 칼날 같은 훈계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 들어야 했다.

 

< 한 여자 >

현명하고 이성적인 한 여자의 결론은 언제나 일관성이 있었다.

 

'없어서 꼭 필요하다면 가격이 얼마든 당신 마음대로 사라. 그런데 며칠 전에 똑같은 팬츠를 구입하지 않았느냐, 있는데 또 사는 당신의 그 물욕은 무섭고 질기다. 진절머리가 난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뭔가 한 군데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정말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당신에게 엄청 화가 난다.'  

한 남자는 마치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었고,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감성적으로 호소해도 한 여자를 설득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재택근무하는 어린 한 여자 앞에서 큰 소리도 칠 수도 없었다. 마냥 속수무책으로 한 여자의 이성적이고 고전적이며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질책과 훈계를 받고 또 들어야 했다. 눈 앞에서 한 남자가 혼나는 모습에 실실 웃고 있는 한 여자도 화난 한 여자 편에 서서 한 마디씩 거든다. '아빠가 잘못했네.' 두 여자가 밉다. 함께 사는 두 여자가 이때만큼은 밉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깟 싸구려 바지 하나 더 샀다고 난리야 흑흑' 이런 훈계를 들어야 하니 한숨이 나왔고, 울적했다.

한 남자에게 점심해주기가 싫다고 한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오늘 점심을 사란다. 오호 그래 살게. 이 말은 한 여자의 화가 풀어지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재택근무 중인 또 다른 한 여자에게 얼른 가 물었다. '우리 점심 무엇을 먹을까, 아빠가 살 거다' 했더니 생각해 보겠으니 제 방에서 얼른 나가 달란다.

 

결국 점심은 연어와 단호박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야채샐러드로 두 여자가 정했고, 또 주문했다. 계산은 물론 한 남자 카드로 긁었다. 한 남자 카드로 배기팬츠 하나를 사고, 점심값 2만 원이 더 들어갔다. 두 여자와 점심 먹으면서도 두 여자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한 남자를 용서한 후라 식사 분위기는 경직되지 않고 부드러웠다. 

오늘 배달된 리넨 배기팬츠의 색상은 아쿠아(밝은 색조의 녹색을 띤 청색)다.

 

< 구입한 팬츠 / 이미지 출처 GS쇼핑몰 >

 

한 남자가 아쿠아 색상을 소화하기에는 부담스러운 팬츠이긴 하다. 하지만 패션도 용기다. 어떤 형태와 색상의 상의를 걸쳐야 매칭이 자연스러울지 한 남자는 모르겠지만 착용 후 첫 느낌은 개 만족이다. 혼나더라도 한 남자는 다른 색의 배기팬츠를 또 고르기로 결정했다. 검색창의 광고는 한 남자를 위해 계속 배기팬츠와 배기팬츠를 입은 젊은이가 나와 빈번히 반짝반짝거리며 멋을 표출한다.

 

배기팬츠를 좋아하는 한 남자여. 그만 눈독 들이시게. 에고, 배기팬츠여! 아 배기즈여.   

2020. 7. 29. 애정 어린 구박을 받고 쓰다.

 


배기팬츠(baggy pants / 배기즈, baggies)는 허리에 턱을 잡아서 주위를 넓게 하고 발목은 꼭 맞게 만든 바지로 1970~1980년대에 유행했다. 자루 모양같이 헐렁하고 넓적다리 윗부분이 넓은 팬츠이다. 원래는 남자용의 옥스퍼드 백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배기즈(baggies)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