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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정말 잘 살았다

수려선 협궤열차가 달렸던 철다리 옛사진을 보고

by 이류의하루 2012. 12. 29.

어머니께서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대통령 선거니 투표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아내와 함께 투표소인 매류초등학교에 갔었지요. 능서면 매류리에 위치한 모교이기도 합니다. 

막강한 5년의 권력을 부여하는 대통령 선거 투표시간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고요. 투표를 마치고 어머님과 드라이브를 하려다 아무래도 연로하셔서 그만두었죠. 대신 매류리에 있는 생닭을 판매하는 가게에 들러 생닭 한 마리에 6천원, 붕어빵 여섯마리에 2천원을 주고 샀는데요. 

< 70년대 초 협궤열차  운행됐던 수려선의 매류역이 위치했던 매류리의 현재 모습 >

 

아내가 생닭과 붕어빵을 사는 동안 근처에 있는 60-70년대 매류역과 마을풍경을 그려 놓은 곳을 렌즈에 담았습니다. 이름하여 '아 옛날이여! 60년대 매류역과 마을풍경' 

<오른쪽이 이천 방향이고 그 반대편이 여주 방향 >


그 그림을 보고 매류역에 대한 추억을 포스팅하려고 검색을 하다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진을 발견했는데요. 바로 여주군史에 실려있는 우리 동네 철다리 사진입니다. 

<철교 위로 리어커를 끌고가는 모습, 그 아래 양화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

 

사진을 보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사연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더군요. 

 

아! 저 철길, 수 많은 사연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용은2리(용구머리) 집에서 매류국민학교까지는 3키로미터 정도 되지요. 늘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갔지요. 그리고 저 다리를 건넜고요. 물론 가을부터 개울에 나무다리를 놓아 준 덕에 그리로 건너기도 했지요.      

 

그  철길로 가다보면 보이고 밟피는 게 작은 돌맹이들이었죠. 그 돌이 우리에겐 가장 갖고놀기 좋은  장난감 역할을 했죠. 철로에 돌을 올려 놓고 기차가 지나가면서 박살나는 장면을 보고 통쾌했고, 철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던 전선 위에 참새를 돌로 던져 잡기도 하고, 돌을 던져 전봇대를 맞추는 내기도 종종 하고요. 그러다보니 철길로 등교하는 애들은 멀리 던지기를 잘했죠. 아마 그때 야구를 알았다면 대부분 투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철로 틈 사이에 못을 휘어 놓으면 기차가 지나가면서 납짝하게 해줘 그걸로 칼도 만들고, 철로에 널브러져 있던 뱀에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까지 버린 젊은 총각 아저씨의 슬픈 사연도 있는 곳이구요.

 

이천장에 다녀오면서 깨지지 않는 무거운 짐을 밖으로 던져, 매류역에서 우리 동네까지 들고오는 수고로움을 더는, 순박한 꼼수를 부리는 어른들도 있었지요. 여주역에서 표 없이 몰래 기차를 타 매류역에서 내리지 않고 경사진 철로에서 속도를 낮추는 순간 뛰어내리시던 어른도 계셨구요. 

 

두려움과 무모함을 연결한 그 옛날 철다리!!!!!!!!!!!!!!!

 

매류역에서 협궤열차나 전동차가 출발하면 철다리 중간 쯤에 서 있다가 뻭하는 경적소리를 듣고 개울로 뛰어 내리던 겁 없이 담력 테스트를 한 친구는 이미 50을 훌쩍 념긴 중년이죠. 겁 많은 아이들은 철로 아래 공간으로 내려가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올라오고, 그러다가 기차에서 버려지는 오물을 뒤집어 쓰는 일도 간혹 겪었구요. 

 

좌우로 다정히 손잡고, 그렇지만 위험스럽게 다리 위 철로를 곡예하듯 건너는 친구들도 있었고, 누가 더 빨리 건너나 내기도 했었지요. 그러다가 침목을 고정한 쇠붙이에 걸려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직전까지 간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경험했구요. 자전거를 철로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건너는 묘기도 어쩔 수 없이 보여야 했던 곳이지요. 비오는 어느 날, 철로를 건너는 아이들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취재 온 기자의 요청에 따라 위험한 포즈도 취해 봤구요.

 

결국 두 레일 사이에 침목을 두텁께 쪼개어 폭이 30cm되는 널판을 깔아 주더군요. 그때는 달려서 건너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그 위로 자전거를 타는 재주까지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꿈은 철다리 건너다 기차 만나 꽝 부닥치기 직전, 혹은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자전거 끌고 건너 가다가 그만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뒤에서 기차는 막 달려오고 나는 옆으로 피하지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만 땀 뻘뻘 흘리며 허우적 허우적 달리다가 잠깨기가 일쑤였죠.   

<당시 역사의 모습 - 대부분 비슷했던 걸로 기억됨>

 

흑백 사진 속 지금봐도 깨끗한 물. 맑은 모래. 거긴 우리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던 곳.

 

한여름 내내 개울에서 멱을 감고, 고기를 잡았지요. 장마때는 수박이다 참외다 수 없이 떠내려오고 심지어 돼지까지 꼴까닥 자맥질하며 떠내려오고 냇물은 황톳물이었죠. 그 진흙탕의 거친 물살을 가로지르며 이 편에서 저 건너 둑까지 무모하게 건너는 개폼 수영도 하구요.

 

물이 빠지면 어른 팔둑만한 메기가 하천을 역류하며 올라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놈 잡으려고 이리 쫓고 저리 쫓으며 풍덩풍덩 옷 젖는 줄 모르고 넘어지기도 하며 뛰어다녔죠. 빨래에 집중하다 그만 아이까지 잃어버린 어느 엄마의 가슴 절인 사연도 있고, 밤엔 서리한 과일을 여자 애들이랑 씻어먹는 순정이 싹트던 유년의 개울이었죠. 

 

달빛 밝은 날 목욕하는 여자 몰래 훔쳐보며 소리지르기도 하고, 오랜 퇴적으로 높아진 개울가에서 다이빙이랍시고 하다 모래와 접촉으로 살짝 안면이 까지기도 했었죠. 

 

물결 조용한 곳 피라미 떼가 바글바글 거렸고, 조용조용 발로 모래를 조금씩 힘주어 밟다보면 모래무지도 잡히고. 물이 더 빠져 발목까지 찰 정도면 산소가 부족한 지 피라미 떼가 하늘로 날세게 튀어오르는 장관도 연출하구요. 피라미 암컷인 불거지의 빛깔은 더욱 선연한 그해 여름 진흙으로 만들어진 굴 같은 곳을 손을 넣고 뒤지면 큰 붕어나 게도 잡고, 가끔 쏘가리를 잡다가 쏘이고, 그러다가 그만 뱀에 물리기도 했던 그 개울, 흙백사진 속 물은 속까지 비치며 맑게 유유히 흐르네요.

 

6.25. 때는 철다리를 폭파하려다 인근에 떨어져 큰 웅덩이가 패여 진 곳도 있었는데요. 그곳은 우리들의 야외 수영장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발가벗고 종일 물놀이에도 지치지 않았던 곳이며, 휴식이 필요하면 철다리 아래 그늘에서 두꺼비집짓고 놀다가 다시 웅덩이로 달려가기도 했지요. 얼굴 곳곳에 번진 버짐도 구릿빛 피부의 한부분으로 착각할 정도였고요. 위쪽엔 국회의원이 되면 다리를 놔주겠다는 공약에 따라 상판없이 교각만 달랑 세워 놓았던 하천. 

 

바다는 갈 수 없었고, 실내외 수영장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 시절, 그 하천엔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다 있었던 우리들의  파라다이스였지요.       

 

개울 이름도 모르다가 능서 면소재지 지날때 서 있던 양화천이란 표지를 보고 그때서야 아 양화천이구나 했죠.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졌던 이름이라고 하구요.

 

생각하다보니 '아. 옛날이여!!!!!  그때 그 시절'로 나 돌아갈테야!!!!!!!!!!!!!!!!!!!!!! 

수려선은 여주와 수원을 잇는 협궤 철도 노선인데요 1930년 12월에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여주 지역의 쌀을 수탈할 목적으로 부설했지요. 일제 강점기 이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여주와 수원 사이의 철도 교통 수요가 급감해 결국 1972년 3월 31일 전 구간이 폐선되었는데요. 폐선 당시 노선 연장은 73.4km였다네요.

 

협궤열차와 전동차가 달려던 수려선은 철로 사이 즉 궤간이 76.2cm정도 였지요. 철로와 레일 사이의 너비가 표준인 143cm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좁은 형태로 운행됐었던 거죠. 그래서 그런지 가끔 탈선하는 아찔한 경우도 보았지요.     

 

매류역이 위치했던 매류리는 옛 영화를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쉽지 않지요. 이곳에는 초등학교, 보건지소, 슈퍼, 공인중개사, 떡방앗간, 미장원, 교회 등이 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던 그 시절에 비하면 보잘것 없지요. 그게 비단 이곳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농촌 지역 대부분의 현실이죠.

 

그 역동적이고 생기있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을까하고 고민하며 그 시절 추억을 담아봤어요. 

 

사진(흑백사진)출처 여주군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