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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 달을 살았다

[제주한달살이] 28일 차 / 사려니숲길, 걷고 또 걷고 싶다.

by 이류음주가무 2022. 2. 22.

- 녹산로, 사려니숲길, 표선해수욕장

지난밤 카페에서 마신 차 때문인지 통 잠을 자지 못했다. 일출 전에 녹산로를 가야 해서 일찍 일어났다. 어제 사둔 햄버거와 우유는 차 안에서 먹고 음료수와 초코파이는 사려니숲길을 걸으며 먹을 계획이다. 

녹산로로 향했다. 해는 떠 있어서 서둘렀다. 몇 곳에서 찍었지만, 좋은 구도를 잡고 촬영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사려니숲길로 서둘러야 해서 구도나 피사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려니숲길로 차를 몰았다. 한차례 현장을 방문했고, 지나가기도 했었다. 

아침 여덟 시 조금 넘는데 다행히 주차장에 주차 중인 차는 두어대에 불과하다. 차를 세우고 사려니숲길 입구에 들어섰는데 몇 개의 코스가 있어 어리둥절했다. 영업하러 온 트럭 사장님께 물으니 결국 한 곳으로 이어진단다. 입구에 삼나무는 가득했고, 조용했지만 바람 소리와 새소리는 가득했다. 특히 까마귀의 매력적인 중성 음은 사려니숲길의 정적을 한 번에 날려 버린다. 

처음에는 줄 곳 임도로 걸었다. 포장된 도로를 지나니 그야말로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약간 붉은 흙길도 나오고 포장, 비포장, 숲속 오솔길로 이어지고 이따금 계곡을 지나기도 한다. 편안한 운동화를 싣고 걸어도 불편함이 없을 길이다. 급경사 등은 없고 완만하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중간에 쉼터가 있고, 또 화장실을 설치했다. 현재 걷는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어 누구나 무리 없이 능력 닿는 대로 걸을 수 있다. 

한 시간을 걸을 때까지 누구도 보지를 못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숲이 존재하는 듯했다. 바람은 산들산들 시원했고, 공기는 상큼, 청량 어떤 표현을 해도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해발 500m의 숲길로 가장 좋다고 하는 근거도 있단다. 

윌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는 통제했고, 물찻오름은 휴식년제를 운영한다. 노란 복수초가 만개해 지천이고, 산수국은 이제 겨우 입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아직 초록의 세상에 진입은 하지 않았지만 봄의 정령이 여기저기에서 활보하는 분위기다. 잔잔한 바람은 가슴을 흔든다. 미세한 흔들림이 좋다. 숲은 언제나 움직이며 변한다.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는 이치와 순리를 생각하며 다소곳이 걷고 또 걷는다. 다음에 연두랑 걸을 때는 온전히 걷는 데만 집중해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숲속에서는 오직 나의 걸음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세상의 잘못을 남을 탓하기보다는 나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걷다 보니 어느덧 안내소가 보인다. 삼나무숲길로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정적을 깬다. 전반적인 느낌은 그래도 약간 오름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갈 때는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겠다 싶다. 쉼터에서 음료와 초코파이를 먹고 있으니 까마귀 한 마리가 다가온다. 조금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더니 냉큼 다가와 쪼아 먹는다. 마치 까마귀에게는 익숙한 일상처럼 말이다.

다시 가방을 메고 되돌아간다. 이제는 걷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 함께 걸었고,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편으로 등지고 걸을 때보다 초록이 더 물든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는 가방에만 넣고 가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찍고 걸으며 사려니숲길을 온몸으로 체험하다 보니 입구에 도착했다. 왕복 20㎞가 조금 넘는 거리를 걸었다. 5시간 정도 걸렸고, 간식으로 점심을 먹었더니 허기가 몰려왔다.

 

얼큰한 해장국이 생각났다. 표선리에 있는 ‘영희네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오후라 손님은 없었고, 한우 해장국을 주문했다. 보글보글 끓는 해장국의 향은 구수했다. 내장은 많고 신선했다. 맛은 역시 최고다. 허겁지겁 먹고 나서 숙소로 갔다.

 

샤워를 하고 세탁을 마친 다음 표선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딱히 어디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피곤했고, 또 다섯 시간을 걷다 보니 이번에는 가랑이가 약간 쓸렸다. 표선 해안가에 있으니 해수욕장이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노출에 조리개를 조여 찍기보다는 그냥 멋진 바다, 감성적인 바다를 담고 싶어서 조리개를 열고 노출을 약간 과하게 하면서 찍었다. 슬쩍슬쩍 타인의 뒷모습을 담았는데 괜찮아 보인다. 또 해안가를 걸었다. 올레4코스로 바다는 푸르지만, 노을과는 반대편이라 처음보다는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국수앤’으로 들어갔다. 보말전복칼국수를 주문했다. 역시 이 집 칼국수도 굿이다. 해안가에 물이 더 들어오고 빛도 계속 변하고 있어 계속 몇 컷을 더 찍고서 생각했다. 이제 육지로 간다면 나의 모습은 또 어떻게 변하고, 또 어떤 여행을 꿈꾸게 될지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올레길이나 오름, 숲 등을 걷는 계획은 없다. 다만 오로지 나를 찾아보고 되돌아보는 일정으로 보낼 계획이다. 2021.3.2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