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일 /2023.5.24.
세토내해 나오시마 섬, 예술의 감동 속으로 빠지다.
피곤함이 지나쳤던 걸까? 그래서 푹 자지는 못했다. 그래도 피곤하지는 않았다. 해가 바다에서 떠오르는 줄 알았는데 건너편 산 위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다. 오전 다섯 시 조금 넘어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연두와 밖으로 나왔다. 새벽이라 바닷바람은 다소 쌀쌀했다. 항구로 나갔고, 곧 해는 떠오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고성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가봤다, 안전 담장을 치고 보수 중인 듯했다. 다시 숙소 근처 횡단도로를 건넜다. 잔디밭에는 <줄리안 오피>의 걸어가는 형상의 사람 조각상이 서너 개가 서 있었다. 부산에서는 영상으로 봤던 그 조각이다.
<다마모 공원>을 관람하려고 했더니 문이 닫혀 있다, 알고 보니 여섯 시부터 입장은 가능했다. 다카마쓰역에는 출발을 기다리는 기차가 조용히 철로 위를 지키고 있었다.
어제 가이드가 말한 상가 쪽으로 찾아갔다. 이른 시간이라 행인은 드물었다. 상가와 거리는 단정했다. 쓰레기 하나, 담배꽁초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역시 조용하고 깨끗했다. 큰 도로를 지나기 위해 육교를 건넜다. 육교 역시 깨끗했고 육교에서 바라본 도로 역시 차분했다.
다시 골목길을 찾아가며 일본에서의 첫 아침을 걷고 또 걸었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꾸렸다. 오늘은 <나오시마 섬>을 관광한 후 다른 장소로 이동해 이틀을 한 호텔에서 잘 예정이다. 샤워까지 마친 후 1층 식당으로 갔다. 일본 호텔에서의 첫 아침 식사다. 다른 일행은 이미 먹고 있었고, 짐까지 꾸려 로비에 앉아 있는 일행도 있었다.
고급스러운 호텔이라 아침은 좋다. 눈앞에 생맥주가 보이는데 마시고는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 짐을 싸 내려왔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나오시마 섬>을 방문하는 날이다. 문화원의 문화탐방 일정은 어쩌면 우리 동아리를 위해서 준비한 듯했다. 그래서 문화탐방 희망자를 모집하는 공고가 나자마자 나는 아내랑 간다고 바로 신청했다.
일행 모두가 로비에 모였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걸어서 횡단도로 두 개를 건너 <다카마쓰 항>으로 이동했다. 오 분 정도의 거리다. 항구에 도착하니 이미 전용 버스는 페리에 승선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모두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태운 버스는 페리로 들어갔고, 승선 절차를 마치자 버스에 내려 배 위로 올라갔다.
사실 이번 문화탐방에서 예술의 섬, 나오시마의 핵심인 지중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베네세 박물관 관람을 문화탐방 중의 백미로 꼽았다.
<다카마쓰 항>을 떠난 페리는 흔들림도 없이 <미야노우라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창가 쪽에 앉아 있다가 갑판 위로 올라갔다. 아침이라 선선했지만 잔잔한 바다,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멀리 보이는 산과 도시 그리고 교각, 갑판 위가 좋았다.
50여 분을 항해한 페리는 나오시마의 상징인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보이는 <미야노우라항>에 다다랐다. 도착하기 전, 나는 선상에서 빨간 호박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인증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페리에서 내린 전용 버스는 항구 마을을 지나 산길을 돌아서 다시 해안가를 거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중미술관에 도착했다.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안도 타다오>는 건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여 그들을 모이게 하는 장소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과 흰 구름이 반겼다. 시간을 두고 미술관 입장은 진행됐다. 조별로 입장했다. 2조라 두 번째 입장해야 하나 가위바위보를 해서 1조 대표가 6조 대표에게 그만 졌다. 두 번째 입장에서 다섯 번째 입장이 됐다. 4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매표소 안에 있는 아트숍을 찾았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영어로 작성된 ‘지추(지중) 핸드북’을 한 권 샀다. 건물과 세 작가의 작품을 담은 책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촬영을 철저하게 제지한다고 가이드는 미리 알려줬다.
지중미술관은 2004년에 설립됐다. 나오시마의 아름다운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건물 대부분을 지하에 매설했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지역에 <안도 다다오>가 빚어낸 지중미술관이라는 문명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다. 길을 따라 <안도 다다오>의 건축 정수가 오롯이 반영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지중미술관 속으로 하나둘 빨려 들어갔다. 모네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이 작은 개천에 자라고 있어 마치 그림 속의 지베르니 정원을 걸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오로지 월터 드 마리아,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등 세 작가의 작품만을 영구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중미술관은 어떤 모습으로 공간을 연결하여 우리를 반길지 떨리도록 궁금했다.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오르막길을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건물 벽들이 공간을 간결하게 가로지르고 세로로 그어졌으나 닫혀 있지 않았다. 그 열린 미술관 공간에는 <안도 다다오>가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는 물론,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이 미술관과 하나가 되어 우리는 반기고 있었다. 연결은 빛과 바람을 타고 또 다른 연결로 이어졌다. 틈새로 보이는 세상은 닫힌 듯 열려있었다. 간결했고, 그 틈으로 바람과 빛이 서늘하면서도 밝게 들어왔다.
지중미술관 속으로 빠진 우리 일행은 물론, 다른 관람객들도 틈새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이 조금씩 이동함에 따라 건물의 음영은 또 다른 기하학적 모양을 빚어냈다.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내려서 첫 번째 전시관에 도착했다.
첫 번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설치 미술작가 월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시간/영원/시간 없음)이다. 작가는 세밀한 치수와 함께 공간을 제시하고, 그 공간에 직경 2.2m의 구체와 금박을 입힌 27개의 목제조각을 사방에 배치했다. 작품 공간의 입구가 동쪽으로 일출부터 일몰까지 작품은 시시각각 변했다.
드디어 작품과 대면했다. 계단 위의 검은 구체와 그 위에 장엄하게 내려앉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마음은 두근거렸고, 입에서는 짧은 탄성이 터졌다. 높은 천장에 뚫린 직사각형으로 푸른 하늘이 보이고 빛이 쏟아지는 장엄한 순간은 지금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황홀경이었다. 이 순간만으로도 이번 문화탐방은 그 가치나 감동은 충분했다. 마치 <베르니니>의 걸작 <성녀 테레사의 환희>처럼 기쁨에 가득한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지침에 따랐다.
두 번째는 클로드 모네의 5점의 수련이다. 모네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상파 작가 중 하나다. 모네는 햇빛 속에서 수련을 그렸다. 지하 지중미술관에서는 자연의 빛만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배치했다. 마치 그 속에서 수련이 피어있는 듯했다.
노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말년에 그린 수련은 화가를 많이도 닮았다. 물감을 거칠게 바른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꽃이 피고, 잎이 되고, 물이 일렁이고, 빛이 났다. 볼수록 아름다운 그림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눈 속에 담고 또 담았다.
세 번째는 <제임스 터렐>의 <빛을 경험하다>를 체험했다. 빛, 그 자체를 예술로 표현한 터렐의 작품을 명확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작가는 형태와 크기를 직접 설계했다. ‘에이 프럼 페일 블루(1998 프로젝터)’, ‘오픈 필드(2000, LED), 오픈 스카이(2004, LED) 작품은 10여 분 동안 작가가 창조한 빛의 변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파란빛의 벽 속으로 발을 조심스럽게 딛자 마치 바닥이 경사진 바닷속으로 잠수한 듯했다. 뒤돌아본 순간 점멸하는 주황, 초록, 적색 등 변화하는 빛깔들의 조화와 깊이감은 분명 <제임스 터렐>을 빛의 연금술사라는 명성에 부족함이 없었다.
십여 분을 빛 속에 몰입했다. 빛의 색상변화는 물론 그 깊이감까지 느껴졌다. 나는 발을 조금 움직이면서 더 심연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해봤다. 그러던 찰나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휘청이며 되로 물러섰고, 곧이어 빛은 서서히 사라지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이처럼 지중미술관에서 빛의 향연은 하루 아니 사계절 내내 작품이나 공간의 표정과 풍경을 멈추지 않고 변화시켰다. <안도 다다오>가 창조한 공간과 세 작가가 빚어낸 작품은 각자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지중미술관의 존재 이유처럼 보였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주차장 버스 안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오시마 섬에는 단체인원이 먹을만한 식당이 없어 도시락을 준비했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의 환경 보호 차원이라니 불편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다. 맛도 좋았다.
다음은 이우환미술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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