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달살이] 13일 차 / 2021.3.8.(월)
- 유민미술관, 덴드리 카페, 서귀포매일올레시장 회 센터
간밤에도 설쳤다. 약을 먹어도 불면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와 괴롭힌다. 오늘 아침도 미역국이다. 정말 진력날 법한데도 맛있다. 맛은 구수하고 목 넘김은 부드럽다. 이 맛을 변경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어쩌면 한 달 내내 부드럽고 구수한 미역국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오늘은 어제 입장하지 못한 유민미술관 관람과 다연이가 소개한 귤밭에 있는 카페 탐방, 그리고 오후에는 친구와 ‘서귀포매일올래시장’에서 만나 소주 한 잔하는 일정이다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는 겨우 10분을 늦어 미술관에 입장하지 못했다. 오늘은 입장 시간에 맞추어 유민미술관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1만 2천 원이다. 조금 ‘비싸다’라는 느낌이 살짝 다가왔지만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기대감이 이를 상쇄했다.
유민미술관은 섭지코지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고 지어진 느낌이다. 건물은 단정했고, 또 있는 듯 없는 듯했다. 노출 콘크리트 양식을 본태박물관에 이어 유민미술관에서도 잘 표현했다. 가로와 세로, 그리고 직사각형의 낮고 단정한 프레임, 한눈에도 그만의 독특한 건축물임을 느낀다.
미술관 직원은 입장하면서 계속 왼쪽으로 들어가란다. 나는 왼쪽으로 향해 걸었다. 벽면에 설치된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성산 일출봉도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벽과 벽 사이도 콘크리트 벽이고, 제주의 검은 돌도 있다. 그 아래 자라난 초록의 잡초조차 싱그럽고 아름답다.
작품 전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자동문을 누르자 생각지 못했던 놀랍고 조용한 세상이 눈 앞에 전개된다. 우선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샌들을 신으란다. 신들을 신고 조심스레 들어갔더니 멍석을 깐 바닥을 걷는 느낌이다.
빛과 유리 공예품의 절묘한 형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안에는 오직 나 혼자다. 소리는 나의 샌들 소리와 숨소리뿐이다. 바람 소리도 간간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 틈새를 파고든다. 틈마다 자연광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절제된 조명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20여 년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단 공예 디자인 운동인 ‘아르 누보’의 유리공예 작품을 비추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따라 수공예 예술이 길을 잃자 일군의 작가들이 공예 부흥 운동을 전개했고, 그때의 작품을 미술관을 건립한 유민이 수집하여 전시한 미술관이 바로 유민미술관이란다.
나는 공간에만 집중하기도, 서둘러 이동하기도, 공예작품에만 집중할 수도, 건물구조에 감탄하기도, 빛에 집중하기에도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힘들었다. 하나가 된 공간과 작품과 시간 속에 미술관은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한 시간 동안 나는 내밀한 미술관 전체를 나만의 공간으로 독점했고, 감상했고 또 즐겼다. 건축물이나 소장품의 가격을 산정해보면 수백억 원에 이를 텐데, 한 시간 동안은 오직 나만을 위한 독점공간으로 이용했다는 이 뿌듯함, 행복감을 무엇에 비길까. 엄청난 호사를 누리니 흥분되면서 어깨가 펴졌다. 신화를 모티브로 제작한 유리공예에도 도자기처럼 상감기법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나오는 데 떠들썩한 일군의 여인네들의 목소리가 조용한 미술관을 흔든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시간을 이미 충분히 누린 만큼 그들도 그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누리도록 바라며, 미술관을 나왔다. 나오면서 건물 전체를, 건물과 성산 일출봉을, 섭지코지를 또다시 눈에 담았다.
다연이가 소개해준 ‘덴드리’ 카페로 향했다.
‘유민미술관’과 숙소 중간인 ‘김영갑두모악갤러리’ 인근에 ‘덴드리 카페’는 있었다. 민박과 식당, 카페와 귤밭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특히 카페는 귤 선별장처럼 귤밭 한가운데 있었다. 건물은 작았지만, 그 형태는 마치 하얀 비닐하우스 모양처럼 지붕이 둥글다. 내부 벽면은 가로와 세로의 창을 길게 설치했다. 홀 중앙에는 화단을 조성해 내부가 마치 살아있는 정원처럼 생기가 가득하다. 창가로 잘 익은 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창문을 열고 손을 창밖으로 내밀면 딸 수 있을 듯하다.
나이 든 분은 창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고, 젊은 친구들은 인증샷이 더 중요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마들렌을 주문했다. 나 역시 마시고 먹는 일보다 카페 내부를 관찰하고, 사진을 담기에 바빴다. 물론 커피도, 마들렌도 맛있었다. 창가에 비치는 자연광에 커피도 아름답다. 한 것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귤밭에는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오고 간 마치 오솔길처럼 발자국이 나 있다.
모두가 이 밭에서, 카페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남기고 떠났으리라 상상해본다. 내가 만약 내일이라도 당장 건물을 짓는다면 이 형태도 하나의 후보로 꼽을만하다. 그러면서 찍고 또 찍었다.
친구와 만날 약속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또 ‘김영갑두모악갤러리’에 들렀다.
지난번에는 내부를 감상했고, 오늘은 외부에 있는 동백꽃을 찍고 싶었다. 여성 두 분도 동백꽃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그분을 배경으로 동백꽃을 찍고 또 찍었다.
숙소로 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표선리에서 101번 직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늘 약속된 시간에 도착했고, 버스 안 손님은 드물었다. 서귀포시 등기소 앞에서 하차한 후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걸어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매일올레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을 눈여겨 둘러 봤지만, 월요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유명한 맛집 앞에도 오늘은, 지금 이 시간은 손님이 드물다.
약속된 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그가 다가왔다. 머리는 약간 빛났고, 덩치는 옛날 그대로 날렵하다. 30여 년 만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1988년 6월 처음으로 성북구청 돈암2동사무소에서 나란히 근무했었다. 그는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사준 보신탕을 그때 처음으로 먹어봤다. 어느 날 그는 집 근처인 강서 쪽으로 전근했고, 나는 10여 년을 성북구청에서 더 근무하다가 고향과 인접한 이천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서로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SNS상에서 서로를 확인했고, 한번 만나자며 통화까지 했다.
우리는 가까운 횟집으로 이동했다. 광어와 우럭 그리고 도다리로 구성한 모듬회 중간을 주문했다. 제주도 한라산 소주도 추가했다. 차디찬 소주는 찰지고 싱싱하고 달달한 회와 함께 술술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강서로 가 근무하다가 어느 때인가 교육공무원이었던 부인이 사표를 제출한다고 하며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같이 떠났고, 본인도 그만두겠다고 했다나. 그래서 결국 같이 그만두었단다. 제주에서 올레길을 걷던 중 빌라 분양 광고 홍보물에 홀려 계약을 했고, 그 바람에 제주에서 생활해 왔단다. 독일 여행 중에도 ‘코로나19’ 때문에 국내 입국이 어려웠지만, 간신히 입국했던 얘기를 그는 담담히 말한다.
나 역시 1997년 이천으로 내려온 과정부터 지난해 스페인 여행 이어진 코로나19와 맹장 수술 그리고 심방세동까지 30여 년의 세월을 시간의 소멸 없이 그냥 지나친 것처럼 끝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소주병은 하나, 둘 늘어만 갔다. 공로연수와 정년퇴직, 그리고 부정맥 시술 등을 거치면서 이렇게까지 많이 마셔본 적이 없었다. 겨우 맥주 한 병이면 족했지만, 오늘은 그와 30여 년의 단절된 세월의 기억을 하나씩 풀어내는 시간인지라 술을 마신 3시간 동안은 주량조차, 아니 그동안 치료했던 여러 병조차 걱정이 없다.
얼큰한 기분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또 그렇게 많이 보이는지. 아쉬움을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작별을 고하며 도로변에 있는 ‘아이더’ 매장으로 들어갔다. 연두와 다연이 두 여자가 온다고 했다. 한라산을 오르려면 연두는 스틱이 필요했다. 예쁘고 튼튼한 스틱을 한 쌍을 구했다. 시장으로 다시 지나면서 한라봉 봉지와 또 오메기떡을 샀다.
101번 직행 버스를 타고 표선리까지 와 수요일 한라산 산행을 위한 준비물을 농협하나로마트에서 샀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제주살이도 13일이 지나간다.
< 제주한달살이 소소한 팁 >
- 유민미술관을 온전히 관람하려면 입장객이 없는 이른 시간에 입장하시라.
- 유민미술관은 화요일 휴무다.
- 제주매일올레시장의 회 센터는 가격도 저렴하지만 정말 싱싱하다.
- 제주에는 감귤선별장을 카페로 리모델링해 운영하는 카페가 많다. 분위기 최고다.
- ‘덴드리’ 카페 역시 귤밭 안에 있어 찾는 이들이 많은 카페이다.
'제주도, 한 달을 살아보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한달살이] 15일 차 / 연두, 한라산을 오르다. (0) | 2021.09.09 |
---|---|
[제주한달살이] 14일 차 / 제주4.3평화공원, 아라리오뮤지엄, 이호테우 등대 (0) | 2021.09.02 |
[제주한달살이] 12일차 / 올레2코스, 혼인지가 뭐지? 몸국은? (0) | 2021.07.23 |
[제주한달살이] 11일 차 / 미술관 투어, 좌혜선 작가의 그림에는? (2) | 2021.06.23 |
[제주한달살이] 10일 차 / 올레 4코스에서 먹는 ‘제주고사리문어라면’의 맛은? (2) | 2021.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