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달살이] 5일 차 / 올레 1코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는 여행이 나의 꿈이다.
딸이 어느 날 학교를 휴학하면서 산티아고를 다녀오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바람에 놀란 적도 있었다. 딸의 순례 인연으로 큰동서의 마지막 꿈도 산티아고에 한 줌의 재라도 묻어달라는 유언이 남겨졌고, 결국 처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
제주한달살이를 계획하면서 적어도 절반의 코스는 돌아야겠다고, 최소한 하루에 20km 정도는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이 그 올레길 첫 번째 걷는 날이다. 코스도 제주의 속살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제1코스로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까지 15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5시간 정도 걸린단다.
아침 일찍 표선해수욕장 주변 해안가를 한 시간 가량 걸었다. 약 5km 거리다. 미역국을 맛있게 끓였다. 다양한 곡식이 혼합된 밥도 고슬고슬한 게 식감조차 미적이다. 미역국과 미적인 밥의 조화가 눈과 뇌와 속을 자극하면서 행복하다. 제주에서 맞는 첫 일요일이다. 근처에 표선 성당이 있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성당에 가 미사 올리기가 나도 그렇고 여기 주민도 좀 어렵다. 혼자 주모 송을 받쳤다.
열 시 조금 넘어 숙소 앞 표선 사무소에서 201번 버스를 탔다. 201번은 서귀포에서 제주 시내까지 동쪽 코스를 왕복하는 완행버스다. 투산 차를 끌고 제주로 건너왔지만, 오늘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흥리까지는 50여 분이 소요됐다. 처음 타본 제주 버스로 기사님은 친절했고, 이용객은 주로 어르신으로 몇 분 정도다. 버스에서 내려 출발지점으로 향했다,
다소 흥분된 마음이지만 시흥리의 상쾌한 바람이 나를 진정시킨다. 올레 1코스 첫출발지점에 도착했다. 2만 원짜리 올레 여권 대신 나는 1만 원인 가이드북 제주올레를 구입했다. 그 책에 스탬프를 찍기로 했다. 책을 펼쳐 첫 스탬프를 누른 후 마을 길로 들어섰다.
오늘 일기예보에 따르면 흐리고 약간 비가 온다고 했다. 시흥리 길은 약간 오르막이다. 길은 깨끗했고, 돌담이 있는 밭은 이미 수확이 끝난듯하다. 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절반은 구름이고, 또 절반은 푸르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앞에 걷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름답다. 뒷모습을 담으면 초상권과는 상관이 없겠지 생각하며 몇 컷 담았다.
‘말미오름’ 앞 올레 안내소가 보였다.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말미오름으로 향했다. 계단은 제법 가파르다, 바람은 서늘하게 불었고, 서늘한 바람은 흐르는 땀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말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 동부지역의 속살이 그대로 보인다.
온갖 색깔의 지붕과 돌담 밭이 제주답다. 드문드문 핀 유채밭도 장관이다. 성산 일출봉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새소리는 유리 쟁반 위를 굴러가는 구슬 같다. 순례객들의 걸음에 놀란 장끼가 ‘푸드덕’ 하고 건너편으로 날아간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정겹다. 이어 오른 ‘말오름’에서는 서쪽의 풍경이 깊고 고요하다. 한라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많은 오름이 마치 줄지어 가는 모습처럼 장관이다. 부드러운 능선에 제주의 은밀한 부분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저 모습을 솔직하게 담을 수 있다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저 풍경을 프레임에 온전히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하는 사진이 나올 듯한데 지금은 어렵다.
종달리 마을로 향했다.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다.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서점, 카페, 빵집, 공방 등이 보이는데 마을 자체가 소소하고 조용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벌거벗은 느티나무와 전봇대와 전선의 얽힘이 사람 사는 세상 답다. 일요일인데도 인적은 드물다. 지나가는 차와 순례객 그리고 간혹 굽어진 어르신이 보일뿐이다.
종달리를 지나 해안가를 돌다 보니 어느덧 출발한 지 세 시간이 지났다. 배는 점점 고팠다. 그러다 보니 목화휴게소에 있는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을 지나쳤다. 처음부터 중간지점에서 스탬프를 찍어야한다는 룰은 생각하지를 못했다.
맛집을 검색했다. 근처에 내가 좋아할만한 국숫집이 있었다. 제주 오면 꼭 먹어야 하는 돼지국수 외 ‘보말칼국수’를 잘하는 맛집이다. 조금 속도를 내 걸었다. 그런데 막상 식당 앞에 도착하니 오늘이 휴무란다. 일요일에 손님이 많을 텐데 휴무란다. 오늘은 ‘보말칼국수’를 먹으며 ‘제주 에일맥주’를 한잔 마시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온 이유다.
혼자 먹을 만한 식당이 눈에 띄지 않아 또 계속 걸었다. 성산포항 종합여객터미널을 지나다가 휴게소 의자에 앉아 싸 온 한라봉 하나를 입에 물었다. 나는 걸으면서 무엇을 먹는 타입은 아니다. 한라봉은 상큼하고 달콤했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성산포 해안가 절벽은 절경이었지만 며칠 동안 강풍 등으로 밀려온 쓰레기가 어마어마하다. 해안가에 이렇게 많은 쓰레기도 처음이다.
성산 일출봉을 지나니 최종 목적지인 광치기 해변까지 1km 정도 남았다.
광치기 해변에는 식당이 없으니 어쨌든 여기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올레 1코스를 조금 벗어나니 고등어구이 전문식당이 보였다. 시간은 오후 2시 반이 넘었는데도 손님은 꽤 많다.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다. 나는 고등어구이를 주문했다. 곧 한 무리의 손님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이 5명 이상이라 곤란하다고 하니 그분들은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여 주신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온 듯하다.
고등어 구이가 나왔다. 인심 좋게 생기신 주인장은 고맙게도 ‘큰 놈을 구웠어요’ 하신다. 맥주 한 병을 주문해 허겁지겁 먹고 마시니 온몸이 나른해진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바람은 조금 거셌다. 곧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처음 올레길이라 약간 긴장을 했지만 결국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다. 썰물 시간이라 해안가에는 선명한 푸른 이끼가 가득하다. 시간은 오후 3시 반이다. ‘제주올레’에 스탬프를 찍었다. 또 셀카도 찍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횡단도로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는 4시에 도착한다.(2021.2.28.)
< 제주한달살이 소소한 팁 >
- 올레 1코스는 코스 초반에 있는 두 개의 오름을 빼면 나머지는 주로 바다를 따라 해안도로와 평탄한 모래밭 길이다. 오름을 오르는 길도 완만하여 어려움이 거의 없다.
- 종달리와 성산 가는 해안도로에 식당 등이 있다. ‘해녀의 집’에서 만드는 고소한 조개 죽과 전복죽이 인기,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면 성산에서 먹을 수도 있다.
- 올레 코스는 시작점과 중간지점 그리고 종점 등 3곳에서 스탬프를 찍는다.
- 올레 코스는 보통 한 시간에 3km 걷는 거리를 기준으로 총 소요시간을 예측한다.
- 올레 1코스를 돌다 보면 중간중간 핫플레이스가 다양하다. 특히 종달1리 교차로에서 ‘종달리 옛 소금밭’ 주변에 많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보고 마시고 먹고 즐기시라.
- 식당에서는 5인 이상 입장할 경우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업소도 있다.
- 순환 버스는 중간지점에서 10분 정도 운전기사 휴식을 위해 운행을 중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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