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가 김장하기 딱 좋아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김장 무를 뽑아 사랑방에 보관해요”
며칠 전 아내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내게 내린 유일한 명령이었다. 무가 얼까봐 걱정해 내린 조치였다. 난 당연히 받아들였다. 마침 서울에서 사는 여동생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화요일부터 추워진다고 하니 월요일에 무를 뽑아 사랑방에 보관하겠다고 아내와 여동생에게 약속했다.
오늘은 무 뽑는 날이다.
딸아이를 새벽에 출근시켜 놓고, 어제 처음 끓여먹다가 남은 아욱국을 다시 데웠다. 조금 짠 냄새가 나 물 한 컵을 더 붓고 끓였다. 두 번 끓여서 그런지 아욱은 더 부드럽고, 국물은 한결 진했다. 밥솥에 있던 찬밥에 아욱국을 말았다. 혼자 먹는 날 표준이자 정석이다. 생애 처음 끓인 국이라 그런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맛있다. 물론 나만의 판단은 아니다. 딸아이도 맛이 제대로 난다며 맛있게 국그릇을 비웠으니 하는 말이다.
밥을 비운 후 잠시 눈을 붙였다. 아내가 부재중이라 그런지 더 게으르고 무기력해진 느낌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밖으로 나가고 친구에게 전화해 술 마시자고 했을 텐데 오히려 아내의 부재는 나의 욕망을 스스로 무장 해제시키는 결과가 됐다.
열시 반에 다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일할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나온 음식물쓰레기와 며칠 전 간 마늘 껍질을 주섬주섬 모아 바구니에 담아 여주로 차를 몰았다.
여주 능서 시골집에 도착해 텃밭으로 향했다. 배추는 속이 꽉 차지 않아 부실했다.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이 보신다면 분명 한 말씀하실 터다. 그래도 무는 누군가의 말처럼 내 종아리처럼 하얗고 반들반들 윤기가 나며 알차게 자랐다. 마침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께서 무를 보고 한 말씀 하신다.
“무수가 김장하기 딱 좋네.”
여주 시골집은 동네 한 복판에 있어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마을 사람들 쉼터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병원 차량을 기다릴 땐 대문 안이 쉼터였다. 지나가다가 덮거나 목이 마르면 물 마실 장소도 우리 집 수도였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오랜 농사 경험에서 나오는 온갖 훈수를 다 하신다.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없다.
모종을 심어놓고, 씨를 뿌린 뒤에도 상주하지 않고 가끔 와 살펴본들 채소가 제대로 될 턱이 있겠는가? 직장 다니며 가끔 와 밭농사를 짓는 아내나 내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네네. 알았습니다. 그런가요?”하며 웃으면서 추임새를 맞춘다. 그러다가 어떤 작물은 가끔 산으로 가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채소는 봄에는 봄바람과 나비가, 여름에는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가을에는 이슬과 서리를 맞으며 그 속에서 잘 자란다, 대견하고 또 고마운 일이다. 동네 어르신의 훈수도 함께 살아가는 마을 정서나 공동체의 애정 어린 관심사로 받아들인다. 마을 어르신의 관심을 먹고 자란 무와 배추가 더 아름답고 소중한 이유다.
비록 아내나 여동생 내외의 도움 없이 혼자 수확했지만 동네 어르신의 관심과 훈수는 내가 일을 즐길 수밖에 없는 에너지다. 이 아니 기쁘고 즐거운 하루가 아닌가.
2018.11.19. 월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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